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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sciousness/Spiritual Quotient(SQ)

내면의 가장 강력한 파워를 이끌어 내는 명료함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가장 많이 생각하고 있는 정신적인 감성지능 중에 하나가 믿음(신념)일 것이다. <<신념의 마법>>이라는 책이 있듯이 믿음은 우리에게 마법과 같은 작용을 한다고 여길 정도로 사람을 자극하여 특정의 결과를 얻는 중요한 동기요소임은 확실하다. 그러나 한 차원 깊게 생각해 보자. 사람들은 왜 더욱더 강한 믿음을 가지려고 노력할까? 그것은 자신의 믿음이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에 기인한다고 본다. 0.1%의 불신이라도 믿음의 뒤편에 자리 잡고 있으면 사람들은 자신의 신념을 더욱 불태워 완벽한 믿음을 만들려고 노력한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일반적으로 하는 우리들의 대부분의 반복적인 기도가 이렇지 않은가 생각해본다. (물론 기도하지 말라거나 신앙 생활에 대하여 부정의 의미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믿음의 완성은 무엇일까?

 
믿음의 완성은 바로 명료함이다. 우리의 내면에서 떠오르는 그 명료함은 믿음의 완성이다.

 

얼마 전 한 교육장에서 대단한 실행력을 가지고 있는 한 분을 만났다. 아는 것, 계획 한 것을 사람들은 왜 실천하지 못할까? 하는 오랜 세월 가지고 있던 나의 궁금증에 대하여 질문하였다.

교수님은 실행력이 대단하신 것 같은데요 마음속의 생각을 그렇게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인가요?”

그 분은 머뭇거림 없이 곧 바로 답변해 주셨다.

저는 일단 어떤 계획이 생기면 그 다음부터는 아무 생각 안 합니다. 그냥 실천합니다.”

그 분이 말씀하신 아무 생각이 없다는 것은 바로 명료함이었다. 강력한 실행력의 배경에 명료함이 있었던 것이다.

 


 

믿음과 신념은 우리에게 인내와 노력이라는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믿음을 가지고 애써 노력하는 것 이다. 그리고 현실 앞에 맞닥뜨리는 시련과 문제들을 인내와 더욱 강한 믿음으로 극복하라고 말한다. 하지만 명료함은 우리를 Flow의 상태에 도달하게 해준다. , 우리를 자연이 가지고 있는 안정의 상태에서 자신이 소유한 주제(소망)는 마땅히 그러해야만 하는 당위의 명제가 되어버린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 우주의 진리와 같이 당위성을 가지게 되면 그것은 더 이상 강한 믿음도 인내와 노력 등 이러한 수고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그냥 자연의 법칙이다. 그렇게 되어지기로 한, 신과 우주와의 약속이고 나는 그 약속이 진행되는 과정에 놓인 경험을 하는 자이다. 믿음은 진행되는 과정에 스스로의 잣대를 가지고 여러 상황 속에 변질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과정이 어떠하던 모든 것을 수용하고 포용하는 것은 바로 명료함이다.

좀 더 심오하게 생각해 보면 명료함은 어떤 일을 하는데 물아일체(物我一體)의 집중력을 가져온다. 불신(不信)과 군더더기의 잡생각이 없는 상태에서 우리는 가장 큰 집중을 할 수 있고 극에 달하는 성취를 이루어 낼 수 있다. 이 부분을 부연설명하기 위해서 사카모토 마사미치가 저술한 <<초의식>>중에 몇 부분을 인용해본다.


궁도()의 명수는 과녁을 겨냥할 때 우선 무심이 되고 자신의 마음과 과녁, 대우주가 하나가 되도록 한다. 이러한 상태가 되면 암흑 속에서도 명중시킬 수 있다. 여기서 소망실현의 극의를 엿볼 수 있다. , 소망을 실현시키고 싶다면 무심의 경지에 이르러 실현하려는 소망과 일체가 되어야 한다.”


노리지 말라. 과녁도, 명중도 그 외 어떤 무엇도 생각하지 마라. 활을 당기고 화살이 떨어져 나가기를 기다려라. 그러면 모두 그대로 이루어지도록 해준다.”


내가 하는 방법을 잘 보았는가. 명상에 잠긴 부처처럼 눈을 거의 감고 있는 상태를 보았는가. 나는 과녁이 점점 작아져 사라질 때까지 눈을 감는다. 그러면 과녁은 내 쪽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과녁은 나와 일체가 된다. 이 상태는 마음을 깊이 가지지 않으면 도달하지 못하는 경지이다. 과녁이 나와 일체가 되면 그 상태는 내가 부처와 일체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는 자연의 일부이다. 그 일부가 하는행위가 아니라 자연 전체가 할 때 된다가 된다. 그래서 우주와 일체가 된다는 표현이 등장한다. 우주와 일체가 되고 과녁과 일체가 될 때 자연에 화살을 풀어주고 거기서 표적 한가운데에 다다르도록 한다. 여기에는 일체의 작위는 없다.”


아래의 글은 명료함를 어떻게 느끼는가를 나타내주고 있다.


소망과 일체가 된 자신의 모습을 의도적으로 보는 상태가 아니라 보인다혹은 느껴진다라고 표현해야 옳다. 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느낌으로 거기에 보인다. 그 느낌을 체험하고 있는 자신이 느껴지는 상태이다. 이 경우는 의도적으로 이러한 상태를 연출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이루어져야 한다. 의도적이라는 의미는 자신의 의지가 반영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무심은 여기에 자신의 마음이 들어가지 않기 때문에 무심이다.”

믿음은 자신의 의도적인 의지를 나타내고 명료함은 바로 이 무심의 상태에서 드러나는 자연의 현상이라 볼 수 있다.




 

이 궁도의 달인이 사라진 과녁을 자신 쪽으로 다가오게 하고 급기야 과녁과 자신이 일체가 된 것, 더 나아가 신과 합일이 된 상태가 명료함의 실체적 표현이라 생각한다.
대상과 나 그리고 신과의 합일이 된 부동의 중심상태가 명료함인 것이다.
이때 무슨 일을 못 이루겠는가?

물아일체속에서 활의 시위를 당기는 활의 명수와 같이 진정한 내려놓음의 경지에 이르게 해주는 것은 바로 명료함이다. 명료함은 우리의 목표를 잊되 잃어버리지 않으면서 Self2 Flow 상태에 놓이게 만든다. <Self2 Flow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신 분은 Gallwey, W. Timothy<<이너게임Inner Game>>을 참고하세요.>

명료함은 내려놓음, 호오포노포노의 원리와 함께 생각해 보아도 좋은 통찰을 우리에게 안겨준다.

 

9시경 스승을 찾았더니 스승은 집 옆의 도장으로 헤리겔(독일철학자,<<일본의 궁술>>의 저자)을 데리고 갔다. 스승은 가늘고 긴 모기향에 불을 붙여서 과녁의 앞에 세웠다. 그리고 활을 쏘는 위치까지 되돌아온다. 과녁은 깜깜한 어둠 속의 모기향의 미세하게 빛나는 한 점일 뿐이어서 있는지 없는 지도 알기 어려울 정도이다. 스승은 활과 화살 2개를 집어 제1의 화살을 발사했다. 스승은 헤리겔에게 화살을 바꾸게 했다. 1의 화살은 보기 좋게 명중하였고 제2의 화살은 제1의 화살의 뒤에 꽂혀 그것을 가르고 있었다.”

 

명료함 그 것은 인간의 능력이 아닌 신성의 메시지다.

 

당신은 지금 어떤 명료함을 가지고 있습니까?